바이마르 헌법(1919)
1848년 3월 혁명 이후 프랑크푸르트의 파울교회에서 1849년 3월 27일 개최된 독일 제헌 국민회의에서 오랜 토론 끝에 '독일 (제)국 헌법'이 채택되고 다음날 공표된다. 국민회의가 개최된 곳의 이름을 따서 '파울교회 헌법' 또는 '프랑크푸르트 제국 헌법'이라 불린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이를 거절한다.
1871년 4월 16일 이른바 비스마르크 헌법이 새 독일 제국의 헌법으로 효력을 갖게 된다. 이 헌법은 1866년의 북독일 연방 헌법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영향을 미친 이 헌법은 기본권에 대한 조항이 없었고 국가 기관에 대한 권한 규정을 제한하고 있었다. 또한 이 헌법은 국가 형태로 군주제를 규정하고 있었다.
Otto von Bismarck(1815–1898)은 프로이센의 정치가이자 독일 통일을 이끈 대표적인 국가 지도자로, 1871년 독일 제국 성립 이후 초대 제국 총리를 지냈다. 그는 외교와 전쟁을 현실적으로 활용하는 현실정치(Realpolitik)를 통해 독일 통일을 추진했으며, 덴마크·오스트리아·프랑스와의 전쟁을 거쳐 독일 제국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노동자 계층을 포섭하기 위해 세계 최초의 근대적 사회보험 제도를 도입한 정치가로도 평가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면서 제국 체제는 붕괴하였고, 황제 Wilhelm II는 퇴위한 뒤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독일에서는 군주제가 종식되고 공화국 수립을 위한 정치적 재편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19년 1월 19일 제헌 국민회의 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으며 의석은 비례대표제로 배분되었다. 독일 사민당이 최대 의석을 확보했으며 중앙당, 독일 민주당과 연합해 소위 바이마르 연정을 구성했다. 1919년 2월 6일 국민회의는 첫 회의를 바이마르에서 개최하였다. 당시 베를린에서는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의원들의 안전과 독립성을 위해 회의를 다른 곳에서 열 수밖에 없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후고 프로이스가 조문을 작성하였다.
바이마르 헌법은 두 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부는 국가조직, 제2부는 독일인의 기본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세계 최초로 사회적 기본권을 규정한 헌법이다.
바이마르 헌법은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형식적으로 효력을 지속했다. 바이마르 헌법은 다양한 수단에 의해, 예컨대 국가 대통령의 국민과 국가보호를 위한 명령, 입법권을 정부에 위임하는 전권위임법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실상 효력을 잃어갔다. 1945년 6월 5일 연합군이 정권을 인수하면서 최종적으로 바이마르 헌법은 폐기되었다.
연도 | 사건 |
1932.7 | 총선에서 나치당이 약 37% 득표로 제1당이 되었으나 과반에는 미달 |
1933.1.30 | 대통령 Paul von Hindenburg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 보수 정치인 Franz von Papen 등은 나치당의 대중적 지지를 이용하면서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 |
1933.2.27 |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발생 → 공산당 탄압 및 기본권 정지 |
1933.3.5 | 총선 실시. 나치당은 약 44% 득표로 여전히 과반에는 미달하였으나 보수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과 연립해 정부 유지 |
1933.3.23 | 수권법 제정 → 정부가 의회 승인 없이 법률 제정 가능, 바이마르 헌정 질서 사실상 붕괴 |
1934.8 | 힌덴부르크 사망 후 히틀러가 대통령 권한까지 통합하여 ‘총통(Führer)’이 됨 |
<바이마르 헌법은 세계 최초로 사회적 기본권 규정을 두었다. 당시 현실에 비추어 이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독일 기본법(1919)
<독일 헌법의 공식 명칭이 ‘독일 기본법’인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Grundgesetz für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은 독일연방공화국의 헌법이다. 1949년 당시 서독에 의해 제정되어 동독과 통일하기 전 까지의 임시 헌법이라는 의미에서 ‘기본법’(Grundgesetz)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1990년에 통일한 이후에도 ‘헌법(Verfassung)’으로 바꾸지 않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2014년 12월 23일에 마지막으로 개정되었다. 서독의 수도 본에서 기초하였다는 의미에서 ‘본 기본법’이라고도 한다.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독일은 영국·미국·프랑스·소련 4개국에 의한 분할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후 독일의 국가 체제에 대해 점령국 간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서, 1948년에 소련을 제외한 3개국의 점령지역에서 적용되는 헌법의 제정에 3개국과 베네룩스 3국이 합의하였다.
이후 각 주의 의회 대표자로 이루어진 회의가 본에서 개최되었고, 이에 앞서 전문위원회가 기초한 초안을 바탕으로 심의에 들어갔다. 1949년 5월 8일에는 심의된 초안이 바이에른을 제외한 주 의회에서 가결되었고, 5월 23일에 공포되어 다음 날부터 시행되었다.
전문
독일 국민은 신과 인간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고 통일 유럽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진 구성원으로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하며, 헌법 제정권력에 의하여 이 기본법을 제정하였다. 바덴-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브레멘, 함부르크, 헤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라인란트-팔츠, 자르란트, 작센, 작센-안할트,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튀링엔 주의 독일인은 자유롭게 자기결정권을 가지며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성취하였다. 이로써 이 기본법은 모든 독일 국민에게 적용된다.
제22조
①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는 베를린이다. 수도에서 전체국가를 대표하는 것은 연방의 의무이다. 그 자세한 사항은 연방법률로 정한다.
헌법관 논쟁
독일 헌법이론에서 말하는 법실증주의 헌법관은 헌법을 무엇보다도 법규범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 관점에서는 헌법이 정치적 주장이나 가치 선언이 아니라, 국가 질서 속에서 최고 효력을 가지는 법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헌법의 효력과 의미는 개인의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법체계 안에서 정합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헌법을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규범 질서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며, 대표적으로 한스 켈젠의 이론에서 잘 드러난다. 이 헌법관에 따르면 헌법은 정치와 구별되는, 엄밀한 법의 영역에 속한다.
결단주의 헌법관은 헌법을 단순한 규범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국가의 근본적인 정치적 결단으로 이해한다. 이 입장에서는 헌법 조문 하나하나보다도, 국가가 어떤 체제와 기본 방향을 선택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헌법은 법 이전에 정치적 선택의 산물이며, 그 선택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주권자라는 것이다. 이 관점을 대표하는 학자인 카를 슈미트는 헌법을 국가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근본 결단으로 파악하였다. 이 헌법관에서는 헌법을 이해하기 위해 법조문뿐 아니라 정치적 현실과 권력 구조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Carl Schmitt(1888–1985)은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사상가로, 주권을 “예외상태에 대해 결단할 수 있는 권력”으로 이해하는 결단주의적 국가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자유주의 의회주의를 비판하며 강력한 국가권력을 옹호했고, 1933년 이후 나치 정권에 협력하여 나치 법학의 이론적 정당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6년경 SS 내부 비판과 권력투쟁 속에서 나치 지도부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에서 밀려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받았지만 전범 재판에는 회부되지 않았으며, 이후 공직에서 배제된 채 독일 플레텐베르크에서 학문 활동과 저술을 계속했다. 그의 사상은 논쟁적이지만 정치신학, 주권론, 국제질서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도 정치철학과 헌법이론에서 중요한 참고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다.
통합론을 제안한 사람은 루돌프 스멘트이다. Rudolf Smend(1882–1975)은 국가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가 상호작용하며 형성되는 통합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통합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개인주의나 전체주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를 전제로 하며 함께 형성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헌법 역시 단순한 문서나 일회적 정치적 결단이 아니라 국가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결속시키는 통합의 원리로 이해하였다. 스멘트는 이러한 통합이 지도자 중심의 인적 통합, 선거와 의회·행정 절차를 통한 기능적 통합, 그리고 상징과 가치에 의한 물적 통합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이후 Konrad Hesse(1919–2005)는 이 이론을 발전시켜 헌법이 현실 속 통합 과정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규범으로서의 안정성과 힘을 강조함으로써, 헌법의 현실성과 규범성을 함께 설명하는 헌법이론으로 통합론을 정교화하였다.
이러한 헌법관에 관한 논의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학설상의 대립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법실증주의, 결단주의, 통합론은 각각 헌법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는 이론적 시도이며, 헌법을 보다 입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법이 규정한 바를 현실이 따라가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읽기 자료
헌재 2019. 12. 27. 2016헌바96, 판례집 31-2하,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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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관계를 파악해 보자.
청구인은 2015. 4. 18.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년 전국집중 범국민대회 및 청와대 인간 띠 잇기’ 행사에 참석하던 중 인근에 정차 중인 경찰버스의 깨진 유리창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 태극기(가로 약 45㎝, 세로 약 30㎝)를 빼내어 집회를 통제하고 있던 경찰을 향하여 치켜들고 평소 담배를 피우기 위하여 소지하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여 태웠다.
검사는 청구인이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태극기를 불태운 것이라 보고 형법 제105조를 적용하여 공소제기 하였으나, 당해사건(제1심) 법원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청구인에게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이 있었음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부분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의 무죄를 선고하였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6. 2. 17. 선고 2015고단6516 판결). 이에 대하여 검사가 항소하여 공판절차가 진행 중이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6노833).
형법 제105조(국기, 국장의 모독)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청구인은 형법 제105조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는 조항에서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 부분은 자연인이 아닌 대한민국에 인격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타당하지 않고, 수범자가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의 행위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명확성원칙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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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항은 명확성 원칙에 위반되는가?
대한민국은 독자적 기능을 가지고 일정한 의사를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국가공동체로서 국민 개인이 가지는 명예⋅권위와 구별되는 고유의 명예와 권위를 가진다. ‘대한민국을 모욕’한다는 것은 ‘국가공동체인 대한민국의 사회적 평가를 저해할 만한 추상적 또는 구체적 판단이나 경멸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일반인이라면 심판대상조항이 금지⋅처벌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예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으며, 심판대상조항이 지닌 약간의 불명확성은 법관의 통상적⋅보충적 해석으로 보완될 수 있다. 따라서 심판대상조항은 명확성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