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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 근대국가의 헌법

근대 이전의 국가

김준석, 근대국가, 55면.

<중세 봉건제도에서 주권, 영토, 국민이 존재했을까?>

중세 말 근대 국가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 유럽에서는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봉건제라고 명명된 통치 조직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봉건제는 지배 계층 내에서 이루어지는 영주에 대한 봉신의 충성 서약과 영주가 봉신에게 수여하는 은대지를 핵심으로 하는 제도이다.
충성 서약을 통해 봉신은 영주에게 복종과 지원이 의무를 졌고, 영주는 이에 대한 대가로 봉신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토지와 이 토지에 종속된 인력을 지배할 권리를 주었다. 봉신은 수여된 토지 일부를 다시 다른 봉신들에게 수여하고 영주의 위치에 서기도 했다.
대단히 위계적으로 보이는 이 제도는 실제 운영 방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주에 대한 봉신의 독립성이 꾸준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봉신은 복종과 지원을 조건으로 수여된 은대지를 세습과 증여를 할 수 있는 개인 소유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또 한 명의 봉신이 여러 명의 영주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은대지를 받는 것도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러한 결과 영주와 봉신 사이의 관계는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의 관계라기보다는 동일한 귀족 집단에 속한 두 구성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평등한 계약 관계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유럽 중세 시대의 전쟁은 중무장한 기마병이 중심이 되어 비교적 소규모로 치러졌다. 이는 소수의 기사들만이 값비싼 갑옷과 각종 보호장구, 전투용 말을 구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었기 때문이고, 국왕이나 상급 영주가 봉건 의무를 명목으로 오랜 기간 이 기사들을 자신의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세의 전쟁 양식은 새로운 군사 기술의 도입으로 14~15세기를 전후하여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근대국가

김준석, 근대국가, 61면.

<근대 초기, 절대왕정 국가가 지배력을 확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6, 17세기 유럽에는 수많은 전쟁이 계속되었고, 이 시기 유럽의 국제관계는 그야말로 전쟁의 시대로 불릴 만큼 국가들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유럽인들의 삶은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시기의 전쟁은 그 이전의 전쟁과 비교하여 규모와 강도 면에서 더 커지고 세졌는데, 이는 주요 군사 기술이 중세 말에 이어 다시 한번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군사 기술의 변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총이 널리 보급되어 보병 부대의 핵심 무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소총은 제작비가 많이 들고 실제 전투에서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병력에 의한 밀집 사격이 필수 요소였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일 년 이상 이어지는 포위전 기간에 식량과 무기를 보급해야 했다. 그 결과 전쟁에 동원되는 병력의 규모와 이를 동원하고 유지하기 위해 소요되는 재원이 심하게 증가했다.
군사 역사가들이 ‘군사혁명’이라고 이름 붙인 이러한 대대적인 전쟁 양식의 변화를 겪으면서 유럽 국가들은 점차 근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춰갔다. 막대한 재정 부담을 봉건 귀족이 아닌 국가만이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가의 영토와 인구에 대한 일원적, 독점적 지배 역시 강화되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봉건 귀족과 도시의 상인 계층 등 사회집단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시기 유럽 근대국가의 역사는 (1)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 끊임없이 투쟁하는 국가의 역사인 동시에 (2) 국내적으로는 권력 독점을 꾀하는 국가와 이에 저항하는 사회집단 간의 갈등의 역사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의 갈등과 투쟁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유럽의 근대국가는 두 가지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절대주의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입헌주의의 길이었다.

입헌주의

김준석, 근대국가, 123면.
절대주의와 입헌주의 국가 건설의 길을 걸어간 국가 중 최후의 승리는 후자를 선택한 국가들에 돌아갔다. 입헌주의는 모든 근대국가가 추구해야 할 ‘이상’의 위치를 차지했지만, 절대주의는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입헌주의는 절대주의와 달리 국왕 혹은 정부의 권력 행사가 일정한 제도를 통해 제한 내지는 견제되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한 국가 형태를 의미한다. 입헌주의에서 국가의 권력 행사를 제약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부의 구성과 권한의 한계를 규정하는 일련의 규칙과 규범을 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독립적인 복수의 정부 기구들에 권한을 분산하여 권력의 집중을 막고, 이들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입헌주의가 현실화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18세기 후반부터 절대주의의 길을 포기하고 입헌주의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정치 질서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1815년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 후 왕정이 복구되고 구 왕조가 다시 권력을 잡았지만, 1789년 이전의 질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약 반 세기에 걸친 정치적 혼란기 끝에 1871년 제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입헌 공화국으로의 이행이 완료되었다.
한국의 근대국가라는 제도는 서구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 수입의 과정은 자발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19세기 말 중국이 무기력해지면서 조선도 근대국가의 건설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많은 학자는 오늘날 한국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들이 해방 이후 시기와 한국 전쟁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데 동의한다. 해방 직후 한국에서 국가 건설을 주도한 것은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은 국가 기구의 운용이 자유민주주의와 입헌주의의 제도와 절차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근대국가에서 절대주의가 아닌 입헌주의가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근대국가를 직접 만든게 아니라 외국으로 부터 수입했다는 사실때문에 남게 된 과제는 무엇일까?>

읽기 자료

헌재 1989. 12. 18. 89헌마32등, 판례집 1, 343
사실관계를 파악해 보자.
국가보위입법회의법 부칙 제4항 후단이 규정하고 있는 "…… 그 소속 공무원은 이 법에 의한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그 직을 가진다."라는 내용은 공무원에게 귀책사유의 유무를 불문하고 면직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헌법상 보장되고 있는 공무원의 신분보장규정(구 헌법 제6조 제2항, 헌법 제7조 제2항)과의 관계에서 그 위헌 여부가 문제되는 것이다.
공무원의 신분에 관하여 법률로 정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헌법이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헌법 제7조, 구 헌법 제6조)라고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직업공무원제도가 국민주권원리에 바탕을 둔 민주적이고 법치주의적인 공직제도임을 천명하고 정권담당자에 따라 영향받지 않는 것은 물론 같은 정권하에서도 정당한 이유없이 해임당하지 않는 것을 불가결의 요건으로 하는 직업공무원제도의 확립을 내용으로 하는 입법의 원리를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서 법률로서 관계규정을 마련함에 있어서도 헌법의 위와 같은 기속적 방향(羈束的方向) 제시에 따라 공무원의 신분보장이라는 본질적 내용이 침해되지 않는 범위내라는 입법의 한계가 확정되어진 것이라 할 것이다.
과거 헌법이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법률에 대해 제소할 수 없다고 한 규정은 지금도 유효한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제정한 법률과 이에 따라 행하여진 재판 및 예산 기타 처분등은 그 효력을 지속하며, 이 헌법 기타의 이유로 제소하거나 이의를 할 수 없다.“라는 구 헌법 부칙 제6조 제3항의 규정은 구 헌법의 기본권 보장 규정과도 모순, 충돌되는 것이었던 만큼 현행 헌법에서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부응하여 반성적 견지에서 제소금지 조항을 승계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고 따라서 모든 국민은 아무런 제약이 따르지 않는 기본권에 의하여 언제 어떤 절차로 만들어졌느냐에 관계없이 모든 법률에 대하여 법정절차에 의해서 그 위헌성 유무를 따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