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공동회
서희경,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 41면.
한국에서 공화주의적 정치운동은 1919년 3·1 운동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촉발되었던 1898년의 만민공동회는 민회를 만들어 공론을 수렴하고 이를 국정에 반영하고자 했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정치운동이었다. 즉 전통적인 집단 상소나 민란과는 다른 형태였다. 이 민회가 자치에 대한 인민의 자각에 기반하여 동료 인민들과 공동생활의 문제를 협의하고 함께 행동하였다는 점에서 만민공동회는 공화주의적 맹아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만민공동회는 ‘헌의6조’와 의회설립안 등 독립협회가 제기한 다양한 정치적 의견들을 실제 정치현장에서 공동의 의사로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1898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간 독립협회는 정부와 합의한 중추원 개편안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관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 관민공동회는 비록 정례화되지는 못했지만, 인민의 집회에 정부 각료를 입회토록 하여 안건을 결의하고 각료들의 서명을 받아 황제에게 재가를 요구하는 실질적 의미에서의 직접민주주의적 민회였다. 예컨대 1898년 10월 29일 관민공동회에서는 정부 대신과 독립협회 회원, 서울 인민들이 함께 모여 “헌의6조”를 의결하였고 10월 31일 고종은 “조칙 5조”를 발표함으로써 그 내용을 수용했다.
“헌의6조”는 형식상 전제황권을 기본 정체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재정, 조약체결, 인사 문제와 관련하여 전제황권을 공공화하고 있다. 왕의 자의가 아닌 ‘장정’ 곧 인민의 의사를 존중하여 인민과 함께 협의하여 정치를 행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헌의6조”의 군민공치는 입헌군주제와 다르지 않다. 김홍우는 이를 “조선조 역사상 최초로 군민이 직접 체결한 계약이라는 점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1899년 8월 고종은 ‘대한국국제’를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외적으로 선포하는 성격을 지니지만, 동시에 전제황권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결국 대한국국제에 의하여 “헌의6조”는 파기되고 만다.
<오늘날 만민공동회가 열려 당신이 연사로 나선다면 무엇을 주장할 것인가?>
임시정부 헌법
서희경,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 109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귀국할 때까지 다섯 차례의 개헌을 통하여 헌정체제를 지속하였다. 우선 망명정부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정을 거듭한 헌법안을 작성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부형태의 변동은 리더십의 존재 여부와 정치적 상황의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들과 대한민국 건국헌법의 연관성 및 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은 체계 및 용어에 있엇 건국헌법과 고도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임시헌법(1919), 대한민국임시헌장(1944)과 건국헌법인 대한민국헌법(1948)을 비교해 보면, 전문, 총강,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경제, 회계·재정, 헌법개정 및 부칙 등 세 헌법이 체계 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둘째, 헌법 틀을 넘어 더욱 주목할 점은 헌법의 근본원칙, 즉 헌법정신과 이념의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세 헌법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였고, 민주공화국, 국민주권, 기본권 보장, 권력분립 등 헌법상 기본원칙들을 모두 수용하는 동시에 일치시키고 있었다.
주목해야 할 인물로서 임시정부 외무부장이었던 조소앙을 들 수 있다. 조소앙은 이른바 삼균주의를 주장했는데, 삼균은 균권, 균부, 균지라는 균등의 이념이다. 이것은 1920년대 사회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나타난 한국 독립운동세력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체계화되었다. 일부 의견은 한국 근대헌법에 끼친 조소앙의 기여를 유진오 이상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조소앙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래 근대한국의 헌법과 헌정을 가장 깊이 있게 성찰했다.
<독립운동가 중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해방공간
서희경,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 186면.
첫째, 1945~1948년 해방 전후 한국인의 다수는 즉각 독립과 자치를 원했던 반면, 미국은 신탁통치를 경과한 독립을 주장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미국무부의 국제협력노선이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을 강화해 미국의 의도를 완전히 좌절시킬 것을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무부는 극동위원회의 공동선언안에서 언급한 것처럼 국제협약을 통한 정부수립을 완강하게 고수했다. 그러나 1947년 미국의 통합전략은 완전히 좌절되고, 이승만과 김구의 민족자치노선이 승리를 거두었다.
둘째, 미군정은 남한의 과도정부 수립을 제안하기 위한 과도헌법으로 “조선헌법”을 작성하였으며, 이 헌법을 토대로 미군정 법률고문과 남한 정치지도자 간에 민주적 정부형태와 정부조직에 대한 상당한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우돌의 지휘하에 마련된 “조선헌법”은 행정·입법·사법 세 기관의 권한과 책임을 규정함과 동시에 행정기관 및 의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사항까지를 포괄하였는데, 이는 “남조선과도행정조직법 초안”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안” 등에 영향을 미쳤다.
셋째, 남한 우파의 헌정구상인 “남조선과도약헌”과 중도파의 “조선민주임시약헌 초안”은 두 정치적 지향의 대립을 보여주었다. 이승만은 “남조선과도약헌”을 과도입법의원에서 통과시켜 미국이 국제협력노선을 포기하게 만들고자 했고, 남한의 임시정부 수립을 도모했다. “남조선과도약헌”과 “조선민주임시약헌 초안”을 단일화한 “조선임시약헌”은 해방 이후 공식기구에서 좌우파가 함께 심의과정을 거쳐 합의한, 한국인들의 국가구상을 보여주는 최초의 헌법이었다. 이 약헌안은 정치통합을 둘러싸고 전개된 대립이 최종적인 형태로 응축된 이념과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군정은 “조선임시약헌”의 인준을 거부했다.
<해방공간에서 미국의 한국와 일본에 대한 태도는 어떻게 달랐을까?>
읽기 자료
헌재 2006. 3. 30. 2003헌마806, 판례집 18-1상,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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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 을 계승하고”라고 한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 동포는 대한민국 국적과 중국 국적을 동시에 가진 이중국적자가 되는 것 아닐까?
1992년 8월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이전인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이른바 ‘7․7선언’을 계기로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 극소수이지만 독립유공자 후손을 비롯한 일부 중국 동포들의 한국방문 또는 영주귀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중국 국적을 인정할 수 없었던 관계로 한국으로 입국하는 중국 동포들에 대하여는 중국여권이 아닌 우리 정부가 발급한 “여행증명서”로 입국하도록 하였고, 영주를 목적으로 귀국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하여 한국 국적을 부여함에 있어서는 중국국적을 전제로 한 국적변경 절차 대신 한국 국적을 계속 보유하고 있던 자로서 “국적판정”을 하는 등 당시 시대 상황에 따라 예외적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다가 1992년 한중수교에 따라 중국 동포를 중국 국적을 보유한 중국 공민으로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부는 출입국관리사무나 국적 사무와 관련하여 중국 국적 동포들을 중국 국적만을 보유한 중국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