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선거
1948년 5·10선거로 선출된 제헌국회 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의 주 임무는 헌법을 만드는 거예요. 대통령과 부통령은 이 사람들이 뽑는 건데도 4년을 하게 했어요. 그래서 미묘한 것들이 있었지요.
이제 5·10선거가 어떻게 치러졌나 살펴보지요. 유권자 813만여 명 중에 784만여 명이 등록을 했고, 그 784만 명 중 748만여 명이 투표해서 전체 유권자의 92%가 투표한 것으로 정부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이 선거에서는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중에서 두 곳이 무효가 되었어요. 두 선거구만 미군정이 나중에 선거를 다시 하기로 했어요.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외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서 무장대 등 반대세력에 의해서 선거를 치르지 못하게 됐지요.
이 선거에서는 국회의원 200명을 뽑게 돼 있었지만, 국회의원 좌석은 300개를 만들어놨어요. 나머지 100좌석은 북쪽이 자유선거를 할 수 있을 때 선출해서 국회의사당에 오면 앉도록 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두 선거구가 무효여서 제헌국회 의원은 처음에는 198명이었어요.
198명이 어느 정당에서 당선되었느냐? 첫 번째 선거부터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민당은 미군정의 여당으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막강했지요. 미군정 경찰과 관료가 한민당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어요. 미군정이 적극적으로 육성해주고 보호해주었지요. 그런데 이 한민당이 우르르 떨어진 겁니다.
한민당은 이 선거에 승리를 장담하면서 나섰지만 내심으로 불안해했습니다. 여론이 나빴어요. 이 때문에 한민당 당원 중에 상당수는 한민당으로 나오면 떨어질까 봐 무소속으로 나온 거예요. 통계에 따라 차이는 납니다만, 한민당으로 나와서 당선된 사람이 29명 또는 28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독촉국민회는 55명, 대체로 이승만 계열인데, 다 그런 건 아니에요. 대한청년회는 대청이라 그랬지요. 12명입니다. 그리고 무소속이 85명이나 됐습니다.
<무소속 국회의원이 많아지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제헌의회
서희경,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 294면.
헌법기초위원들은 헌법 초안의 국회 상정 3일 전인 1948년 6월 20일까지 의원내각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6월 15일 이승만은 헌법기초위원회에 출석하여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책임제가 현 정세에는 적합하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완전한 대통령제를 원했다. 6월 17일, 이승만이 이끄는 정파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헌법에 대한 공식 의견을 처음으로 밝혔다. 국호는 대한민국, 국회는 단원제, 그리고 정부형태는 대통령책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태가 바뀌지 않자 이승만은 6월 21일 국회 본회의 제16차 회의에서 ‘전원위원회 개최안’을 제안했다. 그것은 전원위원회라는 비공개회의를 통해 헌법의 제일 중대한 문제를 협의하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헌법기초위원회가 국회의 주요 지도자나 정파들과 하등의 협의도 없이 헌법 초안을 자기들 생각대로, 즉 의원내각제로 채택한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 동의안은 재적 175명 중 가 12표, 부 130표로 부결되었다. 투표 결과는 완전한 참패였다. 김성수에 따르면 “한민당만이 아니라 제헌의원 대다수가 내각책임제를 지지하고, 대통령책임제를 지지하는 것은 이승만을 무조건 따르거나 내각책임제가 되면 한민당의 천하가 된다고 이에 반감을 가진 소수 의원들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국회에서 더 이상 승산이 없자 이승만은 투쟁의 장을 바꾸었다. 6월 21일 오후 그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다시 헌법기초위원회에 출석하여 그는 이 초안이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이 헌법 하에서는 어떤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감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정치적 협박이었다.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여기까지에 이른 정치적 협약을 모두 무효로 하고, 새로운 정치운동, 즉 일종의 반정부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6월 21일 밤, 서상일, 김준연, 조헌영 등 중진의원들은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제헌 헌법에서 대통령제가 아닌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면 어땠을까?>
헌법의 아버지 논쟁
대한민국 헌법 제정에 있어 유진오 창안설에 대한 근거를 정리해보면 제헌의회에 제출된 헌법초안을 만들었던 것이 헌법기초위원회였고, 이 위원회에서 심의했던 헌법초안의 주축안이 유진오와 행정연구회가 함께 제출한 공동안으로 이 공동안을 통상 유진오안이라고 불렀다는 점, 제헌의회의 헌법심의 과정에서 헌법전문가로 소개되고 헌법이론적 설명을 도맡아 했던 것이 유진오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유진오 창안설에 대한 반론의 근거로는 유진오안으로 불린 공동안은 유진오의 헌법안과 무관하게 행정연구회가 준비했던 것으로 법률 전문가의 이름을 붙여 설득력을 더하려고 했던 것일 뿐이라는 주장, 제헌헌법은 경성제국대학 헌법교수인 유진오의 헌법 지식이나 사상의 결과물이 아니며 오히려 이승만, 신익희, 조소앙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제헌헌법의 정신과 골격은 이미 상당부분 유진오가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기 이전이 임시정부 헌법 제정과 개정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헌법의 실질적 내용을 결정한 것은 바로 제헌의회 국회의장이자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었다는 것이 이승만 결정론의 주장이다. 특히 제헌헌법의 국가구조는 유진오의 학문적 소신이었던 의원내각제, 양원제 모두를 채택하지 않았으며, 이승만이 주장한 것과 같이 대통령중심제, 단원제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의 건국 구상이 헌법에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 제헌헌법의 중심 내용을 실질적으로 결정한 것은 이승만이었다는 점에서 이승만이 국부이자 헌법의 아버지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질적으로 헌법초안을 만든 것은 행정연구회였고, 행정연구회는 제헌의회 부의장이자 정부 출범 이후 국회의장이 된 신익희의 주도하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신익희를 헌법의 아버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신익희와 함께 임시정부의 핵심으로 임시정부 헌법의 이념적 토대를 형성한 조소앙을 헌법의 아버지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