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의 의의
헌법재판이란 헌법의 내용과 효력에 관하여 분쟁이 있는 경우 최종적으로 권한이 있는 기관에서 심판하는 국가기능을 말합니다. 헌법은 정치적 성격이 매우 강하며, 헌법재판 역시 다른 재판보다 정치적 성격이 더 강합니다. 다시 말해 정치적 세력이나 입장에 따라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사안에 대해 재판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는 일반 법원이 헌법재판, 그중 위헌법률심판을 담당합니다. 독일이나 우리나라는 헌법재판소라는 특별한 기관을 만들어서 그 기관이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 심판을 총괄적으로 담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관장 사항에 대하여는 헌법 제111조 제1항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은 1987년 제9차 개정헌법, 즉 현행 헌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유명무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제1공화국에서는 헌법위원회, 제2공화국에서는 헌법재판소, 제3공화국에서는 대법원과 탄핵심판위원회,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에서는 헌법위원회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은 헌법재판소를 규정하였고, 1988년 9월 1일 헌법재판소법이 발효되었으며, 9월 19일 재판관 9인이 임명되어 헌법재판소가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설립된 이래 2019년 1월까지 35,842건의 사건을 접수하여 그중 1,679건의 사건에서 위헌 또는 인용 결정을 선고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헌법재판소의 의의는 통계상 실적으로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봅니다. 독재와 권위주의 정부 시절 헌법은 사실상 죽어 있었으며, 장식에 불과했습니다.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훼손되고, 기본권은 무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무엇이 헌법을 위반하는 법률인지, 무엇이 헌법을 거스른 국가작용인지를 판단하고 위헌으로 선언합니다. 이제 헌법은 헌법재판소를 통하여 살아 있는 헌법, 규범력을 갖춘 헌법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헌법재판소의 출범
헌법재판소는 1960년 제3차 개헌 헌법에서 도입된 바가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것은 1987년 제9차 개헌 헌법, 그러니까 현행 헌법부터이다. 1988년 9월 1일 헌법재판소법이 발효되었으며, 9월 19일 재판관 9인이 임명되어 헌법재판소가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1991년에는 3인의 비상임재판관 자리를 상임의 재판관으로 바꾸면서 명실공히 헌법 법원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었다.
그렇다면 1987년 개정헌법은 왜 헌법재판소를 도입하였을까. 앞서 살핀 바와 같이 1987년 개헌은 8인 정치회담이라는 막후 협상을 통해 추진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개헌의 이유는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헌법재판소에 관해서는 약간의 자료가 남아 있다.
원래 여야 정당들은 모두 헌법재판소를 신설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원에 헌법재판 권한을 맡기는 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8인 정치회담에서 민정당은 갑자기 헌법재판소를 신설하는 안을 제시했다. 왜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8인 정치회담이 시작되던 7월 24일 대통령의 별장이었던 청남대에서 휴가를 보내던 전두환에게 민정당은 개헌안을 보고한다. 여기에서 전두환은 헌법재판을 대법원이 하게 되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루게 될 것이고 사법부가 정치적 분쟁에 휩쓸려 독립이 위태롭게 될 우려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재판관으로 구성되는 헌법재판소를 두자는 안을 당론으로 정하자고 한다.
전두환은 왜 갑자기 이런 의견을 내놓은 것일까? 당시 대법원이 헌법재판권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를 했다는 의견도 있고 유명 헌법학자들이 헌법재판소의 신설을 요구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야당은 여당의 헌법재판소 신설안을 왜 받아들였을까? 보도에 따르면 8월 19일 민주당의 이중재 의원이 국민이 직접 위헌심사를 헌법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된다면 여당 안을 수용하겠다는 역제안을 한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헌법재판의 한 종류인 헌법소원 심판 수용을 조건으로 헌법재판소 신설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왜 이중재 의원이 여당 안을 받아들였는지 왜 이전까지는 주목받지 못했던 헌법소원을 조건으로 걸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설명도 신문 기사나 8인 정치회담 참여 국회의원들의 회고담을 기초로 어렴풋하게나마 더듬어 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정작 87년 헌법을 통해 만들어진 헌법재판소의 공식 기록에는 기본적 팩트와 너무나 동떨어진 헌법재판소 도입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헌법재판소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헌법재판소 청사 이야기
이범준,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 2009
임명장을 받은 재판관들은 서울 정동빌딩 16층 옛 헌법위원회 사무실에 짐을 풀었다. 헌법위원회는 1972년 유신헌법으로 설립돼 단 한건의 헌법재판도 하지 않는 사실상 유령 조직이었다. 어느 1기 재판관은 아예 양로원이라고 했다. 헌법위에서 승계한 직원도 일반직 7명, 기능직 4명, 고용직 8명이 전부다. 헌재는 민주화 헌법에 탯줄을 댔지만 시작은 미약했다.
정동 청사에는 소장 조규광만 방이 있었다. 상임헌법재판관 5명이 한 방에 모였다. 중고등학생처럼 책상을 맞대로 앉았다. 비상임재판관 3명이 회의가 있는 날에만 출근해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열악한 이유는 헌법위원회 사무실을 그대로 물려받은 데 있다. 헌법위에서는 상임위원 1명만 출근했고, 나머지 8명은 명예직이었다.
재판관들은 커피를 마시거나 조간신문을 읽으며 오전을 보냈다. 점심때가 되면 근처 서소문이나 신문로 식당으로 함께 나서기도 했다. 주로 한 일은 다 같이 모여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었다. 대통령에게 임명장까지 받은 쟁쟁한 법률가들이 대낮부터 텔레비전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9월에는 서울올림픽 중계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최종적으로 결정한 곳이 지하철 3호선 안국역 근처인 종로구 재동 창덕여고 자리다. 재동 자리는 창덕여고가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하고 남은 터다. 그전에는 경기여고가, 더 전에는 선교사 알렌이 세운 최초의 서양식 종합병원 광혜원이 있었다. 하지만 재동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서 비롯됐다. 1433년 세조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과 가족을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이 곳에 매달았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를 없애려 재를 뿌린 데서 잿골로 불렸고 한자를 바꿔 현재의 이름이 됐다. 1980년 광주를 유혈 진압한 전두환 정부를 극복하면서 세워진 헌법재판소와 묘한 인연이 닿은 곳이다.
재판소 주요 공간에는 모두 청와대 목재가 쓰였다. 백두산에서 가져와 청와대 본관을 지은 나무와 같다. 당시에 노태우 대통령이 헌재 요구는 전부 들어주라고 했다. “재판관실과 대심판정 목재는 모두 백두산 홍송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붉어지는 게 특징이다. 1991년 9월 노태우 정부가 청와대 본관 관저 춘추관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여기에 쓰이고 남은 최고급 홍송을 한창 공사중이던 헌재에 모두 넘겨줬다.
읽을 거리
경향신문 2023.07.18 : 헌법재판소의 ‘서울 재동 백송’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서울 재동 백송’.
소나무 종류 가운데 줄기 껍질에 흰 빛의 신비로운 얼룩 무늬를 지닌 나무가 있다. 중국이 원산지인 백송이다. 백송은 옮겨심기가 잘 안 되는 까탈스러운 나무여서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나무에 속한다. 백송은 그래서 원산지인 중국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외교관이나 중국인과의 친밀한 교유관계를 가진 권세가들의 집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권세가들이 모여 살던 수도권에 오래된 백송이 집중돼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은 헌법재판소 경내에 서 있는 ‘서울 재동 백송’이다. 나무나이 600년, 높이 15m의 큰 나무다. 둘로 나뉜 굵은 줄기가 넓게 벌어져 큰비와 바람에 찢겨나갈 수도 있는 불안한 모습이지만, 백송 특유의 하얀 줄기 껍질만큼은 더없이 인상적이다.
‘서울 재동 백송’이 서 있는 헌법재판소 자리는 우리 근대사에서 기억해야 할 격동의 현장이다. 조선 후기 이 자리에는 형조판서 겸 한성판윤을 지낸 박규수의 살림집이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킨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다.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박규수는 오경석·유흥기를 비롯해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이 집 사랑채에 모여 개화사상을 키웠다. 명실상부한 개화사상의 산실이었다는 얘기다.
갑신정변 실패 후 박규수 집터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와 창덕여고가 들어섰다가 창덕여고가 1989년 방이동으로 교사를 옮겨간 뒤인 1993년에는 헌법재판소가 자리잡았다. 법을 바르게 지키기 위한 최고 기관인 헌법재판소는 이 자리에서 대통령 탄핵 심판을 비롯한 중차대한 사건에 대해 갖가지 중요한 심판을 내렸다.
숱한 한국 근대사의 격변을 또렷이 바라보며 살아온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소 뒤란에 상서로운 흰 빛으로 서 있는 오래된 백송이야말로 말하지 않으면서 가장 많은 말을 담고 서 있는 소중한 우리의 인문학적 유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