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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고조선의 건국 古朝鲜成立

01 생각해 봅시다我们想一想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은 각각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까요? 琵琶形青铜剑和支石墓是做什么用的?

02 한국 역사는 어떻게 변해 왔을까?

02 韩国的历史发生了怎样的变化?

한국 역사를 배우는 이유

了解韩国历史的理由
나라의 교육과 역사가 없어지지 아니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 박은식
一个国家的教育和历史不消失,这个国家就不会衰落。 —朴恩植
한국의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의 말처럼 역사가 바로 서 있으면 나라도 바로 설 수 있다.
正如韩国历史学家、独立活动家朴恩植所说,如果历史是正直的,那么国家也可以是正直的。
현대 한국의 모습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한국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이다.
研究韩国历史和现代韩国,就是为了准确认识韩国的昨天和今天,引导韩国走向正确的方向。
한국의 역사 속에 한국의 오늘이 들어 있고, 현대 한국 사회의 모습 속에 한국의 과거가 담겨 있다.
韩国的今天包含在其历史中,韩国的过去包含在现代韩国社会的面貌中。

한국사의 흐름

韩国历史的流动
한국이 자리 잡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어떤 역사가 이어져 오고 있을까?
韩国所在的朝鲜半岛上延续着怎样的历史?
연표를 보면서 한국의 역사와 다른 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보자.
让我们按年表来看看韩国的历史和其他国家的历史是如何变化的。

03 고조선의 생활 모습은 어떠했을까?

03 古朝鲜的生活怎么样?

고조선의 건국

古朝鲜的建立
하늘에서 내려 온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호랑이와 달리, 환웅의 말대로 한 곰은 여자가 되었고, 환웅과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 <삼국유사>
有一天,桓雄从天而降,统治了人类世界,一只熊和一只老虎来到他面前,恳求他让它们变成人类。桓雄说,如果它们只吃艾草和大蒜,并且100天见不到阳光,就能变成人类。与老虎不同,熊照桓雄所说做了,变成了女人,并嫁给了桓雄。两人的儿子檀君王俭创立了古朝鲜。<三国遗事>
위의 글처럼 곰이 정말 사람이 된 것일까?
这只熊真的像上面的文章一样变成了人吗?
한국인의 조상은 곰일까?
韩国人的祖先是熊吗?
한국 역사의 시작은 고조선 건국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고 있다.
韩国历史的开端——古朝鲜的建立传说可以这样解读。
만주 및 한반도에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이 살고 있었다.
在满洲和朝鲜半岛,居住着崇拜熊的部落和崇拜老虎的部落。
신석기 시대가 끝나갈 무렵, 하늘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환웅 부족이 한반도로 이동하여 들어왔다.
新石器时代末期,自称天之子孙的桓雄部落迁入了朝鲜半岛。
청동기로 만든 우수한 무기를 갖고 있던 환웅 부족은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힘을 합쳐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을 물리쳤다.
拥有精良青铜武器的桓雄部落与拜熊部落联手,击败了拜虎部落。
환웅 부족과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되었고, 단군왕검을 지배자로 하는 새로운 부족을 만들었다.
桓雄部落与拜熊部落通过联姻合并,形成了以檀君王俭为首领的新部落。
이후 단군왕검은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바로 한국인이 세운 첫 번째 국가인 고조선이다.
后来檀君王俭建立了国家,这就是韩国人建立的第一个国家——古朝鲜。

고조선의 생활 모습

古朝鲜生活
고조선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여덟 가지 내용의 법(8조법)을 만들었다.
古朝鲜为了维护社会秩序,制定了八项法律(八条法)。
이 중 세 가지 내용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其中有三项内容流传至今。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杀人者处以死刑。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伤害他人者以粮食赔偿。
도둑질한 자는 도둑맞은 집의 노비로 삼는데, 죄를 용서 받으려면 50만 전의 돈을 내야 한다.
偷盗者将成为失主的奴隶,若想获得赦免,需缴纳五十万钱。

04 주요 내용 정리

한국 역사는 어떻게 변해 왔을까?

韩国的历史发生了怎样的变化?
한국의 역사학자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박은식)은 “나라의 교육과 역사가 없어지지 아니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韩国的历史学家、独立运动家(朴恩植)通过“一个国家的教育和历史不消失,这个国家就不会衰落。”这句话强调了历史的重要性。
현대 한국의 모습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한국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이다. 研究现代韩国以及韩国的(历史),是为了准确认识韩国的昨天和今天,引导韩国走向正确的方向。

고조선의 생활 모습은 어떠했을까?

古朝鲜的生活怎么样?
한국인이 세운 첫 번째 국가는 (고조선)이다.
韩国人建立的第一个国家是(古朝鲜)。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단군왕검)이다.
建立古朝鲜的人是(檀君王俭)。
고조선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8조법)을 만들었는데, 현재는 그 중 3가지만 전해지고 있다.
古朝鲜为了维持社会秩序制定了(八条法),现今只流传了其中三条。
자신의 고향 나라에 전해지는 건국 신화나 건국 이야기를 말해 봅시다. 让我们谈谈您祖国讲述的建国神话或建国故事。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와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我们来谈谈与檀君建古朝鲜故事的异同。

참고 기사

북한, 대규모 고조선 유적지 발굴 朝鲜发掘大规模古朝鲜遗址
2001.07.31.
북한의 관영언론들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연구사들이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에 있는 단군조선 시기의 대규모 부락터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발굴 및 연구사업을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朝鲜官方媒体报道称,社会科学院考古研究所的研究人员在平安南道德川市南阳里,对檀君朝鲜时期的大型部落遗址进行了综合性发掘与研究。
방송은 또 이 발굴작업에 참여한 연구사들의 말을 인용해 남양리 일대에 "10여만 입방미터의 넓은 면적에 150여 개의 집 자리가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됐으며, 그 가운데 "두 개의 신석기 시대의 집 자리와 31개의 단군조선 시기의 집 자리를 발굴"했다고 보도했다. 报道还引用参与此次发掘的研究人员的话称,确认南阳里一带在十多万立方米的广阔区域内分布有150多处房屋遗址,其中发掘出2处新石器时代的房屋遗址和31处檀君朝鲜时期的房屋遗址。
또 당시 생활상과 관련해 중앙통신은 "남양리 유적은 경제력은 물론 사람들의 생활과 활동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하기 위한 강력한 국가통치체계가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확증"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30일 논평했다. 关于当时的生活情况,中央通讯社于30日评论称:“南阳里遗址不仅体现了经济实力,还证明当时已经存在统一组织和指挥人民生活与活动的强大国家统治体系。”
통신은 특히, 남양리 유적 16호 집 자리에서는 단군조선 시기의 대표적 유물인 청동비파형 창끝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通讯社特别报道指出,在南阳里遗址的第16号房屋遗址中,出土了檀君朝鲜时期的代表性遗物——青铜琵琶形矛头。
북한에서 청동비파형창끝은 청동비파형단검과 함께 고대조선 사람들이 살던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었지만, 청동비파형단검보다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 희귀한 유물로 알려져 있다. 在朝鲜,青铜琵琶形矛头与青铜琵琶形短剑一样,曾在古代朝鲜人生活的广泛区域中使用,但比起短剑,它是更加稀有的出土文物。
북한이 단군왕릉과 고조선 시대의 유적 발굴 및 연구 활동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현 북한체제와 수도 평양의 정통성이 고조선과 단군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朝鲜之所以高度重视檀君陵及古朝鲜时期的遗址发掘与研究,是为了强调现有朝鲜体制与首都平壤的正统性源自古朝鲜与檀君。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당나라)를 등에 업은 비자주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평가하고 고구려-발해-고려 등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朝鲜历史学界认为新罗的三国统一是依靠外来势力(唐朝)而实现的,因此是不自主且不彻底的,并主张高句丽—渤海—高丽才是正统的延续。
그리고 북한 역시 이런 정통성을 이어 가고 있고 평양을 조선민족 형성과 발전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 朝鲜亦将自己视为这种正统的延续,并将平壤视为朝鲜民族形成与发展的中心。

참고 기사

이 대통령 ‘환단고기’ 발언 논란…역사학계도 “부적절” 비판
2025-12-15 15:39
이재명 대통령이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역사서 ‘환단고기’를 언급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李在明总统在教育部工作汇报中提及历史书《桓檀古记》,引发了争议。
야당에서는 대통령이 위서로 판명된 책에 동의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在野党方面提出质疑,认为总统是否在认同这本被认定为伪书的著作。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해당 주장에 동의하거나 연구를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总统府对此解释称,并未认同该主张,也没有指示进行相关研究。
이 대통령은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환단고기에 대해 질문했다. 李总统在教育部工作汇报中向东北亚历史财团理事长询问了关于《桓檀古记》的问题。
그는 고대 역사 연구를 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他质疑是否没有进行古代历史研究。
이에 대해 이사장은 역사는 사료 중심으로 연구된다고 답했다. 对此,理事长回答说历史研究应以史料为基础。
이 대통령은 환단고기도 문헌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李总统反问,《桓檀古记》难道不也是文献吗。
또 증거가 없는 것은 역사로 볼 수 없는 것이냐고 질문했다. 他还询问,没有证据的内容是否就不能被视为历史。
환단고기는 1979년 이유립이 출간한 책이다. 《桓檀古记》是1979年由李裕立出版的书籍。
이 책은 고대 한민족의 영토가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있었다고 주장한다. 该书主张古代韩民族的领土曾遍及整个欧亚大陆。
저자는 이 책이 1911년 편찬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作者主张这本书是在1911年编纂完成的。
그러나 역사학계는 해당 판본이 확인된 바 없다고 보고 있다. 但历史学界认为该版本并未被确认存在。
또한 시대에 맞지 않는 모순된 내용이 많다고 지적한다. 同时指出其中存在大量不符合时代背景的矛盾内容。
따라서 역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판단하고 있다. 因此,历史学界普遍将其认定为伪书。
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야당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针对李总统的发言,在野党表达了担忧。
한동훈 전 대표는 대통령의 발언이 매우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前代表韩东勋批评总统的发言是严重错误。
이준석 대표는 환단고기가 역사라면 반지의 제왕도 역사라는 비유를 들었다. 李俊锡代表则表示,如果《桓檀古记》是历史,那么《指环王》也可以算历史。
역사학계에서도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历史学界也普遍认为这一发言不恰当。
강성현 교수는 유사역사학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학의 엄밀성을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姜成贤教授指出,伪历史学为了政治目的损害了历史学的严谨性。
그는 뉴라이트의 역사 해석과 유사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他认为这与新右翼对历史的解释存在类似问题。
기경량 교수도 대통령 발언에 우호적 뉘앙스가 느껴진다고 비판했다. 纪庆良教授也批评称,总统发言中带有对其较为友好的倾向。
대통령실은 논란에 대해 입장을 설명했다. 总统府对此争议作出了说明。
김남준 대변인은 논란이 있는 사안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发言人金南俊表示,对于存在争议的问题有必要进行讨论。
또 역사 연구 기관은 자신의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他还解释称,这一发言的本意是历史研究机构应有自身立场。
이어 역사 문제는 어떤 근거와 연구에 기반하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밝혔다. 他补充表示,历史问题应当依据具体资料和研究来加以判断。
또 역사관이 어떤 시각에서 형성되는지 묻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同时说明,这也是在询问历史观是从何种视角形成的。
결국 환단고기 언급은 특정 역사관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이었다는 설명이다. 最终解释称,提及《桓檀古记》是为了批评某种历史观的语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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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비문, 일제가 변조한 게 맞다”
2020.10.31
414년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의 한 부분에 대한 일본의 해석은 이렇다. 对于建于414年的广开土大王碑其中一部分,日本方面的解释如下。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百济和新罗自古以来就是高句丽的属民。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因此一直向高句丽进贡。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정확하지 않음)와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 可是日本在辛卯年渡海而来,击破了百济、○○(不明确)和新罗,并把他们变成了日本的臣民。”
일제는 광개토대왕비를 이용해 임나일본부의 증거로 썼다. 日本帝国主义曾利用广开土大王碑,把它当作任那日本府存在的证据。
중국 시학, 서예학자인 저자 김병기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한다. 研究中国诗学与书法学的作者、全北大学中语中文学科教授金炳基,对这部分内容作如下解释。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百济和新罗自古以来就是高句丽的属民。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因此一直向高句丽进贡。
그런데 왜(일본)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신민으로 삼았다.” 可是倭(日本)从辛卯年以来开始向百济、○○和新罗进贡,因此高句丽也把倭纳为臣民。”
저자는 ‘속민(屬民)’과 ‘신민(臣民)’의 차이를 알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作者认为,只要理解“属民”和“臣民”的差别,就可以作出这样的解释。
우선 속민은 혈연관계에 있을 때, 신민은 일방적 복종관계에서 쓰는 말이라는 것을 사료에서 밝혀냈다. 首先,他通过史料指出,“属民”用于具有血缘关系的情况,而“臣民”则用于单方面服从关系。
따라서 일본이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뜻이다. 因此,认为日本与高句丽之间是进贡关系才是合理的。
이는 2005년 낸 책의 골자고, 15년 만에 증보판이 나왔다. 这是他2005年出版一书的核心内容,15年后又推出了增补版。
기존의 주장을 강화하고, 초판에 대한 반론에 재반론을 하는 내용이다. 增补版强化了原有主张,并对初版所受到的反驳再次作出反驳。
그 사이 저자는 2018년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해 “한자를 알아야 광개토대왕비를 바르게 해석해 역사를 되찾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고, 온라인에서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其间,作者于2018年出演JTBC《懂中国的课堂》时主张“只有懂汉字,才能正确解读广开土大王碑,找回历史”,并一度登上网络实时热搜。
김병기 전북대 교수는 일제가 비문 내용을 변조했다고 본다. 全北大学教授金炳基认为,日本帝国主义篡改了碑文内容。
증보판에서 저자는 일제가 비문을 변조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주장한다. 在增补版中,作者再次主张日本帝国主义篡改了碑文。
비문 내용 중 ‘바다를 건너와 깨부수었다’는 부분에 해당하는 세 글자 ‘도해파(渡海破)’가 실마리다. 碑文中对应“渡海而来并击破”这一内容的三个字“渡海破”是线索所在。
저자는 이 글자가 총 1775자 가운데 다른 글자들과 형태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변조라고 본다. 作者认为,这几个字在全部1775个字中,其字形与其他文字完全不同,因此属于篡改。
조작 전엔 ‘입공우(入貢于)’ 즉 왜가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他推测,在被篡改之前,这里原本应为“入贡于”,即倭向高句丽进贡的内容。
이렇게 하면 ‘속민’과 ‘신민’을 구분해 사용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这样一来,也就能够解释为什么碑文中要区分使用“属民”和“臣民”。
1972년 재일 사학자 이진희가 꺼냈던 일제 비문 변조 의혹도 근거로 들고 있다. 作者还援引了1972年在日史学家李进熙提出的日本篡改碑文之疑作为依据。
증보판에서 저자는 ‘도(渡·건너다)’ 앞에 ‘래(來·오다)’가 쓰인 것으로 봐서 일제가 문법에 맞지 않을 정도로 변조했다는 논거를 추가했다. 在增补版中,作者又补充论据指出,在“渡(渡过)”之前用了“来(到来)”,说明日本的篡改甚至到了不合文法的程度。
‘와서’ ‘건너갔다’는 건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因为“来了”之后再“渡过去”,在语序上是颠倒的。
또 초판본에 대해 나왔던 “비문의 해석은 역사적 상황에 근거해야 한다”는 반론에 대해 “비문 자체를 철저히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재반론을 펼쳤다. 此外,对于初版曾遭遇的“碑文解释应以历史情境为依据”的反驳,他再次反驳说,“更重要的是彻底研究碑文本身”。
저자가 광개토대왕비를 한 자씩 볼 수 있었던 건 그가 서예가이기 때문이다. 作者之所以能够逐字审视广开土大王碑,是因为他本身就是书法家。
유학자인 선친 김형운 선생과 어려서부터 한문 공부를 했던 그는 초등학교 때 『사자소학』을 외우고 『명심보감』을 읽었다. 他从小就跟随身为儒学者的父亲金亨云先生学习汉文,小学时便背诵《四字小學》,阅读《明心宝鉴》。
1982년 대만에서 시와 서예를 공부하던 중 서점에서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집을 만났다. 1982年,他在台湾学习诗学和书法时,在书店里遇到了《广开土大王碑拓本集》。
아름다운 글씨체에 매혹돼 한 글자씩 전부 따라 써보기를 두 번 반복했다. 他被那优美的字体所吸引,把全部文字逐字临写了两遍。
그는 “그때마다 막히는 글씨가 있었다”고 했고, 그게 바로 변조됐다고 보는 ‘래도해파’ 부분이었다. 他说:“每次都会有几个字让我卡住。”而那部分正是他认为被篡改的“来渡海破”。
이렇게 그는 다른 사학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방향으로 광개토대왕비를 살펴보는 데 20년을 썼다. 就这样,他花了20年时间,从其他历史学者未曾关注的方向来研究广开土大王碑。
서예학자가 광개토대왕비의 변조를 주장하게 된 배경이다. 这就是一位书法学者为何会提出广开土大王碑遭篡改主张的背景。
저자는 기존 역사서에서 출발해 광개토대왕비를 해석하는 건 순서가 틀린 짜맞추기식 연구라 본다. 作者认为,从既有历史书出发去解释广开土大王碑,是一种顺序错误的拼凑式研究。
대신 광개토대왕비 자체를 철저히 연구하고 거기에 바탕해 후대의 기록이 잘못돼 있다면 교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相反,他主张应彻底研究广开土大王碑本身,并以此为基础,如果后代记载有误,就应加以纠正。
글자를 알고, 글자를 통해 문장을 바라봐온 연구는 “우리 자신의 역사관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으로 향하고 있다. 这种从文字入手、通过文字来审视句子的研究,最终指向“要用我们自己的历史观来看待我们的历史”这一主张。

참고 기사

석굴암은 석굴이 아니다
2026.03.19
석굴암은 석굴이었을까? 石窟庵真的是石窟吗?
이 말은 통일신라 창건 당시 김대성이 석굴을 만들려는 생각을 갖고 석굴암을 조성했을까 하는 질문이다. 这个问题是在问,统一新罗时期创建石窟庵的金大成,是否是以建造石窟为目的来修建的。
우리가 부르는 석굴암이란 용어가 정착된 것은 대략 1920년대 일제강점기이다. “石窟庵”这一称呼大约是在1920年代日本殖民时期才固定下来的。
조선 후기 17~18세기 석굴암을 유람했던 조선의 문인들은 석굴과 석굴암이란 용어를 구분해서 기록했다. 在朝鲜后期17至18世纪游览石窟庵的文人,将“石窟”和“石窟庵”作为不同概念加以记录。
이때 석굴은 사원이 퇴락해 지붕이 함몰되어 굴처럼 보였기 때문에 보통명사로 표현한 것 같고 석굴암은 인근에 있었던 관리 암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当时“石窟”是因为寺庙破败、屋顶塌陷,看起来像洞穴而作为普通名词使用,而“石窟庵”则指附近管理的庵堂。
그럼, 오늘날과 같이 석굴암을 석굴사원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那么,像今天这样把石窟庵认作石窟寺院,是从什么时候开始的呢?
형태로서의 석굴과 예배 장소로서의 석굴사원은 그 의미가 다르다. 作为形态的石窟与作为礼拜场所的石窟寺院,其意义是不同的。
1920년대 후반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석굴사원이란 개념이 도식화됐고 뒤이어 1930년대에 와서 한국인 학자들도 석굴사원이란 인식을 갖게 됐다. 20世纪20年代后期,日本人将“石窟寺院”的概念加以体系化,到了30年代,韩国学者也逐渐接受了这一认识。
석굴암을 인도식 석굴사원의 한 형태로 보면서 하나의 세계사적인 패러다임이 창출됐다. 把石窟庵视为印度式石窟寺院的一种形态,由此形成了一个世界史层面的范式。
그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석굴사원 양식이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왔고 다시 한반도에 와서 석굴암이 됐다는 논리였다. 这一逻辑认为,起源于印度的石窟寺院形式通过丝绸之路传入中国,再传到朝鲜半岛,最终形成了石窟庵。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조선 미술의 걸작이라 평가하면서 문화 전파론적 관점에서 발전 단계론을 제시했다. 日本学者在将石窟庵评价为朝鲜美术杰作的同时,从文化传播论角度提出了发展阶段论。
그들은 석굴암을 동양 문화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만들어진 걸작으로 규정했다. 他们将石窟庵定义为东方文化达到顶峰时的杰作。
그러면서 이후 한국 문화가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인식 틀을 만들었다. 同时构建了此后韩国文化走向衰退的认知框架。
어쨌든 석굴암이 인공 석굴이라는 인식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无论如何,石窟庵是人工石窟的认识一直延续至今。
과연 통일신라시대에도 신라인들이 석굴이라는 개념으로 석굴암을 만들었을까. 那么在统一新罗时期,新罗人是否也是以“石窟”这一概念建造石窟庵的呢?
석굴암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한다. 关于石窟庵的记录最早出现在《三国遗事》中。
삼국유사에서는 석굴암을 석불을 모신 절이라는 뜻의 석불사라고 불렀다. 《三国遗事》中将其称为“石佛寺”,意为供奉石佛的寺院。
불상이 봉안된 공간은 석굴이 아니라 ‘석감’으로 표현했다. 佛像所在的空间并非称为石窟,而是被称为“石龛”。
감실은 신성한 존재를 모시는 사당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龛室具有供奉神圣存在的祠堂之意。
이 표현이 당시의 용어인지 일연의 표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这一用语究竟是当时的称呼还是一然的表达尚不确定。
그러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이를 석굴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但可以确定的是,在统一新罗和高丽时期,人们并未将其视为石窟。
이는 사원의 이름이 석불사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这一点也可以从寺院名称“石佛寺”中看出。
토함산 정상에 절터를 닦고 동쪽을 향해 석불을 조성했다. 在吐含山顶开辟寺址,并面向东方建造了石佛。
불상은 화강암을 다듬어 하나의 돌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佛像很可能是用花岗岩整块雕刻而成。
불상 주위에 돌을 쌓고 위에 천개석을 얹어 공간을 형성했다. 在佛像周围堆叠石块,并在顶部覆盖石板形成空间。
삼국유사에는 감실의 뚜껑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国遗事》中记载龛室的顶部曾裂为三部分。
왜 이 공간을 감실이라고 했을까. 为什么将这个空间称为龛室呢?
이는 굴을 파거나 굴 모양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这是因为它既不是挖掘形成的洞穴,也不是仿造洞穴形态。
돌을 쌓아 집처럼 만들고 궁륭형 천장을 만든 것이다. 而是通过堆砌石头形成类似建筑的结构,并建成穹顶天花。
이는 서양의 돔 구조와 유사하지만 한국 전통 궁륭 구조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这类似于西方的圆顶结构,但也可以看作韩国传统穹顶形式的变形。
불국사의 돌계단에서도 아치형 구조가 나타난다. 在佛国寺的石阶中也可以看到拱形结构。
불국사와 석굴암은 서로 보완적인 구상으로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佛国寺与石窟庵似乎是在相互补充的构想下设计的。
불국사는 드러난 세계를, 석굴암은 숨겨진 세계를 상징한다. 佛国寺象征显现的世界,而石窟庵象征隐秘的世界。
주실 공간이 감실 형태인 이유는 그것이 천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主室空间呈龛室形式,是因为它象征天宫。
이는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도리천을 공간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这是对释迦牟尼在忉利天说法场景的空间化表现。
본존불이 있는 주실은 비교적 좁은 공간이다. 供奉本尊佛的主室空间相对狭小。
본존불은 이상적인 불상 비례인 장육존상이다. 本尊佛是符合理想比例的“丈六尊像”。
이 불상은 깨달음의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该佛像表现了成道瞬间的形象。
또한 입멸 후 도리천에서 설법하는 모습과도 연결된다. 同时也与涅槃后在忉利天说法的形象相联系。
주변 벽면에는 제석천과 보살, 제자 등이 배치되어 있다. 周围墙面上排列着帝释天、菩萨和弟子等形象。
벽 상단에는 작은 감실들이 조성되어 있다. 墙壁上部还设有多个小型龛室。
이는 큰 감실 안에 작은 감실이 들어 있는 구조이다. 这形成了大龛中包含小龛的结构。
이 구조는 전체와 부분이 통합된 화엄 세계를 표현한다. 这种结构表现了整体与部分统一的华严世界观。
석굴암은 석굴이 아니라 감실이다. 石窟庵不是石窟,而是龛室。
총 40여 위의 불상들이 천궁의 장엄함을 표현한다. 共有约40尊佛像展现天宫的庄严景象。
비례와 대칭의 원리가 공간 설계에 적용되었다. 比例与对称原则被应用于空间设计之中。
이로 인해 보는 사람은 안정감과 경이로움을 느낀다. 因此观者会感到安定与震撼。
김대성은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공간을 설계했다. 金大成正是基于这些原则设计了该空间。
주실은 본존불 중심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主室以本尊佛为中心构成。
주변 불상들은 본존불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周围佛像起到辅助本尊佛的作用。
결국 석굴암은 석불을 모신 공간이기에 석불사라 불렸다. 因此,石窟庵因供奉石佛而被称为石佛寺。
삼국유사에서 이를 감실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三国遗事》将其称为龛室也是基于这一点。
석굴암은 석굴사원이 아니다. 石窟庵并不是石窟寺院。
김대성은 이를 석굴로 생각하지 않았다. 金大成并未将其视为石窟。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를 석굴이라 부른다. 然而今天我们却称其为石窟。
이는 현대의 시각으로 고대를 해석한 결과이다. 这是以现代视角解释古代的结果。